본문 바로가기
엔터테인먼트

회사원, 소지섭으로도 어쩔 수 없었던 소재의 함정

by 박평 2012. 10. 12.



가끔 기가막힌 소재가 떠오를 때가 있다. 앞뒤 맥락이 없이 딱 떠올리기만 해도 수많은 이야기가 쏟아져 흐르는 그런 소재 말이다. 창작을 하는 사람들에게 있어서 그런 소재는 너무나 매혹적이다. 그리고 그렇게 매혹적이기에 때로는 사람의 눈을 멀게도 만든다.


간첩이라는 영화가 그랬다. 한국에 파견나와 있는 간첩들의 이야기. 그런데 생활고에 찌들어서 먹고사는 걱정을 해야 하는 간첩들의 이야기는 정말 매혹적인 소재였다.


'생활고에 시달리는 남파 간첩들의 이야기'


이 소재만 들어도 '이건 된다'라는 확신이 들기에 충분했다. 그런데 막상 나온 영화는 대중에게 사랑 받지 못했고, 작품 자체로도 큰 인정을 받지 못했다. 영화 중간 중간에 소재를 부각시키기 위한 많은 장면들이 필요했고, 결국 그것이 영화의 흐름을 상대히 끊어냈기 때문이다. 이 영화는 재밌어 지려고 하면, 지루해지고, 신나려 할만 하면 지루해졌다. 그리고 그런 장면에서는 어김없이 '남한에서 사는 것이 얼마나 힘든지'를 반복해서 보여주었다. 소재의 함정에 빠져 버린 것이다. 시나리오 상에서야 '기가 막힌다.', '우와~'라고 말할 수 있겠지만, 결국 과한 소재에의 집착은 영화를 치고 올라가지 못하게 만들어 버렸다. 


영화 회사원은 누가 들어도 고개를 끄덕일만큼 매혹적인 소재를 지니고 있다. 


'사람 죽이는 회사에서 일하는 평범한 회사원의 이야기'


기가 막히지 않은가? 평범한 회사원인데, 세상에 사람을 죽이는 회사에서 일한다니, 이 소재만 가지고도 영화 몇 편을 만들만큼 매혹적이지 않을 수 없다. 단도직입적으로 말하면 이 매혹적인 소재는 영화를 잡아 먹었다. 또 다시 소재의 함정에 빠져 버린 것이다.


(스포일러 있습니다.)

영화는 시종일관 '회사원'의 이야기를 한다. 회사로 부터 쉽게 버림 받는 '비정규직사원', '낙하산으로 들어온 현장경험 없는 얄미운 상사', '그만 두었다가 다시 돌아가고 싶어하는 직장인', '내 위를 죽여야 내가 승진하는 시스템'등... 영화는 '사람을 죽이는 회사'라는 독특한 소재 위에 우리의 평범한 회사생활을 오버랩시킨다. 덕분에 영화는 직장인들의 충분한 공감을 살 수 밖에 없으며, 누군가는 단지 이 부분 만으로도 충분히 영화에 만족 할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안타까운 것은, 영화내내 소재를 부각시키기 위한 너무 많은 모습을 보여주려 노력하다가 결국, 영화 자체적인 긴장감의 폭발을 이뤄내지 못했다는 것이다. 영화의 액션은 순간순간은 강렬할 수 있으나 치고 올라가지 못하고, 종국에는 그냥 그렇게 마무리 된다. 후반부의 액션씬을 위해 철저하게 준비 된 전반부 또한 주인공의 내면과 감정의 흐름을 공감하고 따라가게 하기 보다는 그냥 '회사원'의 모습을 비추려고 함으로서 관객의 감정이입을 막아 버렸다. 소지섭은 멋있지만, 그럼에도 그가 하는 행동들의 당위성은 상당히 떨어지게 된 것이다. 덕분에 영화는 96분이라는 짧은 상영시간에도 조금 지루하다는 느낌을 건네준다. 


갈등의 원인이 사랑이라면 사랑 부분에 초점을 맞추어야 했고, 그것이 동료애나 혹은 어린 직원에 대한 부성애와 같은 것이었다면 거기에만 집중을 했어야 했는데 그러질 못했다. 사람을 죽이는 회사원 자체가 공감대 형성이 어렵기 때문에, 하나에 집중해서 관객이 조금 더 선명하게 감정이입을 할 수 있도록 배려했다면 하는 아쉬움이 있다. 그렇기에 영화의 전반부는 후반을 위해서 철저히 희생하지만 그 효과는 약하다. 


영화를 보는 내내, 후반부에 제대로 터트리려고 지금 이렇게 밑밥을 깔고 있는 거라고 생각하며 후반부의 한방을 기대했지만 그마저도 기대에 미치진 못했다. 소지섭이 복수를 위해 마세라티를 타고 달려간 장면이 나온 후에 다시 아이를 챙기는 곽도원의 모습을 보여 줌으로서 한껏 올라가 있던 긴장감은 갑자기 무너져 내리게 된다. 직장에서는 얄미워도 아이는 철썩 같이 챙기는 그런 회사원의 모습을 다시 한 번 보여주면서 현실의 회사원들의 모습, 그리고 분노한 소지섭의 모습과 대비를 만들려고 했던 의도인 것으로 보이지만, 이미 앞에서 충분히 나온 모습이기에 의도만큼의 효과는 없었다. 


결론적으로 그렇다. '사람을 죽이는 회사에서 일하는 평범한 회사원'이라는 매력적인 소재, 그리고 그것을 자꾸 보이려 하는 욕심 때문에 영화는 오히려 힘을 잃어버렸다. 소재의 함정에 빠진 것이다. 차라리 소재에 대한 욕심을 버리고, 아저씨나 테이큰처럼 시원하게 내 질렀다면 이 영화는 훨씬 더 재밌었을 것이다. 


한가지 다행인 것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소지섭은 멋있고, 이미연은 예쁘며, 곽도원은 얄밉다는 점이다. 이 세명을 떠나 모든 배우의 연기가 한결 같이 훌륭했다. 특히 소지섭은 누가봐도 멋있었고, 동시에 매력적이었고, 그리고 훌륭한 연기를 펼쳐냈다. 그가 원톱 배우로서 손색이 없다는 것을 다시 한 번 입증했다고 볼 수 있다. 소지섭의 팬이라면 당연히 봐야 하는 이유이다. 더불어서 곽도원의 연기도 칭찬하지 않을 수 없다. 그는 비열한 상사의 모습을 완벽하게 그려냈으며, 소지섭과 훌륭하게 대비를 이뤄냈다. 참고적으로 이 둘은 이미 '유령'이라는 작품에서 함께 호흡을 맞춘 적이 있는데, 그 때의 모습과 비교해서 보면 더욱 재밌을 것이다.


'회사원'은 훌륭한 연기, 매우 잘 만들어진 화면 그리고 너무나 매혹적인 소재를 지니고 있는 영화이다. 그래서 더욱 아쉽다. 이 정도의 앙상블이라면 훨씬 더 괜찮은 영화가 나올 수도 있었다고 보여지기 때문이다. 만약 이 영화가 소재의 함정에 빠지지 않았더라면, 그래서 조금 더 단순하게 앞으로 달려나갔더라면 어땠을까 하는 상상을 해본다.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