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엔터테인먼트

뿌리깊은 나무가 남긴 마지막 3가지 메시지

by 박평 2011. 12. 23.
뿌리깊은 나무가 마침내 종영되었다. 한가놈이 한명회였다는 충격적인 반전과 함께, 한글 창제의 의미를 다시 한 번 조명하면서 의미있는 마무리를 지었다고 볼 수 있다. 

뿌리깊은 나무는 단순히 한글 창제의 이야기는 아니다. 작가가 의도했던 아니던 이 작품은 현실을 담고 있었고, 우리의 이야기를 담고 있었다. 따라서 이 작품이 마지막으로 우리에게 던져준 메시지를 살펴 볼 필요가 있다.



- 첫번째 메시지 : 백성은 고통으로 책임진다.

강채윤은 백성은 고통으로 책임진다고 말한다. 소이도 백성은 고통으로 책임진다고 말한다. 그렇게 백성을 고통으로 책임진다. 뿌리깊은 나무에서 백성이 고통으로 책임진다고 말할 때, 그 대사가 가슴에 남았다면, 그것은 그 대사가 현재의 우리 모습을 반영하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대한민국은 지금 고통에 쌓여 있다. 최근에 너무 행복해서 날아갈 것 같다는 사람들을 본 적이 없다. 많은 이들이 세상 사는게 힘들다고 벅차다고 얘기 하며 고통 받고 있다. 

그렇다면 사실 우리는 고통으로 책임지고 있는 것은 아닐까? 우리가 한 일에 대한 책임 말이다. 이 것을 고민 해 보지 않을 수 없다.


- 두번째 메시지 : 한글을 천한 글자로 만들어라.

심종수는 앞으로 밀본의 역할은 한글을 천한 것으로 만들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지금 우리는 한글을 천한 것으로 여기고 있는 것은 아닌지 고민해봐야 한다. 

우리는 이미 한글보다는 영어나 한자 혹은 불어 같은 것들이 더욱 고귀하고 더욱 수준높은 글자라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그래서 말하는 중간에도 간간히 영어를 섞어 쓰면 상대를 납득시키기에 더 도움이 되는 것이 사실이다. 가게는 온통 영어 판으로 바뀐지 오래며, 가요계만 봐도 영어로 만들어진 팀 이름에 영어 제목들이 판친다. 

글로벌화 시대에 이런 것을 마냥 나쁘게만 볼 수는 없겠지만, 상대적으로 한글이 천대 받을 필요는 없는 것이다. 한글날이 되면 각종 포털 사이트의 로고는 '한글'로 바뀐다. 그리고 사람들은 그 것을 보고 '예쁘다'고 말한다. 그런데 그 예쁜 로고는 하루가 지나면 다시 영어로 바뀐다. 그럴 필요가 있을까?

더군다나 밀본의 한글 천대 계획은 결국 '의사소통 수단'을 천한 것으로 만들어 '의사소통 수단'에 담긴 의미까지도 '천한 것'으로 만들려는 것으로 볼 수 있다. 한글로 말하면 옳은 것이라도 '천한 것'이 되어 버리는 것이다. 이거 현실 세계에서도 그대로 사용되고 있다. 

'천치 대학생들은 지금의 반깞 등록금이 미래 자신들의 연금을 당겨쓴느 건 줄도 모르고 트위터나 날리면서 청춘을 보내고 있다'

모 일보 논설위원이 칼럼을 통해 말한 내용이다. 트위터나 날리는 대학생들이 '천치 대학생'이 되어 버렸다. 밀본의 방식과 전혀 다르지 않다. 한글이 그 시대 가장 쉬운 의사소통 수단이었 듯이, 지금은 트위터와 같은 SNS 가 가장 손 쉬운 의사소통 도구중의 하나다. 한글을 천대 함으로서 거기에 담긴 의미를 절하 하려는 방식은 현재에도 그대로 사용되고 있는 방식 중의 하나인 것이다. 그것이 옳은 결과를 가져오든 아니든 말이다.

그래서 우리는 한글에 대해서, 그리고 의사소통 수단에 대해서 다시 한번 생각해 봐야만 한다. 한글을 천대하지 않는 것도 우리의 역할이고 의사소통 수단에 신뢰를 부여하는 것도 사실 우리들의 몫이기 때문이다.


- 세번째 메시지 : 개가 되어도, 다시 나아간다. 

정기준이 말한다. 

'너의 글자로 지혜를 갖게된 백성은 속게 될 것이다. 더 많이 속게 될 것이고, 이용당하게 될 것이다. 사람의 말을 알아 듣는 개새끼 처럼.'

세종이 답한다.

'그래 그럴 수도 있겠지. 허나 그들은 결국 그들의 지혜로 길을 모색해 나갈 걸세. 그리고 매번 싸우고 또 싸울 것이다. 어떨땐 이기고 어떤땐 속기도 하고 어떤땐 지기도 하겠지. 지더라도 어쩔 수 없다. 그것이 역사이니까. 또 지더라도 괜찮다. 수많은 왕족과 지배층이 명멸했으나 백성들은 이 땅에서 수만년 동안 살아 왔으니까. 또 싸우면 되니까.'

이 둘의 대화에는 지금 우리 모습에 대한 통렬한 비판과 위로가 들어있다.

비판은 어쩌면 이런 것이다. 우리는 지금 지혜를 얻은 개새끼가 아닐까에 대한 의문. 지혜를 갖게 되어 더 많이 속고 이용당하고 그리고 위에 말한 것처럼 결국 고통으로 책임지는 백성의 모습으로 존재하는 것은 아닐까? 하는 비판이 여기에 담겨 있다. 그리고 만약 그렇다 하더라도 괜찮다는 위로를 함께 전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우리의 지혜로 길을 모색해 나갈 것이라고. 지더라도 그것이 역사고 그 역사 안에서 우리는 살아남아 계속 싸워 나가면 된다고 말이다.

바로 이 위로는 어쩌면 요즘 유행하는 '쫄지마 씨바'하고도 일맥 상통한다. 역사에서 질 수도 있지만 결국 우리는 우리의 지혜로 다시 더 나은 길을 모색해 나갈 거니 쫄지말고 나아가면 된다는 것이다.


뿌리깊은 나무는 픽션이고 작가들이 밝힌 바 처럼 현실을 비판하려는 의도는 전혀 없이 그저 세종대왕과 한글창제의 이야기를 풀어낸 작품일 뿐이다. 그 것을 가지고 현실과 엮에 해석을 한 것은 꿈보다 해몽이 좋은 본인의 치기다. 하지만 이 허구의 이야기가 현재와 놀랄만큼 연관성이 있다는 것은 그만큼 현실이 드라마 같은 상황이라는 것의 반증일지도 모른다.

어쟀든, 이렇게 한글 창제 이야기는 마무리 됐다. 하지만 현실은 아직 마무리가 안됐다. 뿌리깊은 나무가 전해준 3가지의 이야기들이 더욱 여운으로 남는 것은 우리는 끝나지 않는 역사의 중간에 존재하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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