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엔터테인먼트

짝, 적나라한 연애를 보여주다.

by 박평 2011. 12. 22.
짝이 대세라고 섣불리 말하기는 힘들다. 그러나 일부 시청자층에서 짝은 확실한 대세이다. 시청률도 동 시간대에 방송되는 라디오 스타와 거의 차이가 없으며 짝이 시청률이 더 많이 나오는 일도 있을 정도이다. 처음 시작부터 호평보다는 비난이 많았던 이 작품은 어째서 점점 더 인기를 끌게 되었을까?


- 일반인들의 이야기
짝에 연예인은 나오지 않는다. 초기에는 '싸이'가 중간중간 나오긴 했지만, 이제는 그마저도 사라졌다. 처음부터 끝까지 비연예인들로 구성되는 이 작품은 그러므로 여러 설정에도 불구하고 '다큐멘터리'적 요소를 가지고 있다. 그러므로 이들은 솔직하다. 자기의 성격이 화면 안에 고스란히 비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아무리 신경을 쓰고, 아무리 관리를 하려고 해도 연예인이 아닌 이상 그것이 쉽지 않다. 게다가 1주일 동안 한 장소에서 오직 '사랑'만을 찾기 위해 시간을 보내야 한다면 서로의 관계 속에서 자신의 본 모습이 상당 부분 드러날 수밖에 없다. 그런 점에서 시청자는 날 것을 보고 있다는 생각을 할 수밖에 없다.

그러므로 보는 입장에서는 이것저것 말할 거리가 많아진다. '우리 결혼 했어요'같은 프로그램을 볼 때는 출연진들에 대해 이야기하고 싶음에도 불구하고 사실 마땅히 할 수가 없다. 누군가가 '그거 어차피 다 대본이야'하면 끝이기 때문이다. 시청자가 진지하게 프로그램 틈 사이로 들어가기가 힘들다. 그냥 영화를 보는 것과 같은 재미만 있을 뿐이다. 그러나 '짝'은 이 사람들이 실제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 자기 이미지 관리를 하는 것도 실제로 볼 수밖에 없는 상황, 그렇다면 시청자가 가타부타 할 말이 많아진다. '저 남자는 어떻게 저 여자는 어떻고' 우리는 마치 해설자가 된 것 처럼 마구 이야기를 나눌 수 있다.

- 사랑 이야기

게다가 사랑이야기다. 우리가 모두 겪었던, 누구에게는 쉬웠고 누구에게는 어려웠고, 누구에게는 괴로웠고, 누구에게는 즐거웠던 그 사랑이야기가 펼쳐지기 때문에, 시청자들은 누구든지 자기의 상황 혹은 자기의 경험에 빗대어 이 상황을 분석하고 이 상황을 감상할 수 있다. 그러다 보니 시청자들은 감정이입을 하게 된다. 내가 '저런 놈'을 아는데... 내 주변에 '저런 여자애'가 있는데... 등등. 이런 이야기를 쉽게 할 수 있다.

또한, 우리는 '사랑결핍'시대에 살고 있다. 얼마 전 신문보도에서 밝힌 것처럼 일본은 연애인구 수가 급격하게 줄고 있다고 한다. 한국도 마찬가지다. 점차 연애인구는 줄고 있고, 사랑하는 것 자체가 쉽지 않은 세상이 되고 있다. 신경 써야 할 것, 고려해야 할 것, 해야 할 것이 너무 많은 현대인에게서 사랑이 곧 사치가 되어버리는 시대가 생각보다 빨리 우리에게 다가오고 있다. 모두는 사랑을 갈구하지만 쉽지 않다. 바로 이런 결핍을 '짝'이 채워 주는 것이다.

특히 진실한 사랑의 가치가 높게 평가받는 것과 동시에 현실적인 부분이 중요하게 여겨지는 요즈음에 추세는 '짝'을 통한 시청자들의 대리 만족을 극대화 시켜준다. 사실 대부분의 남자 여자가 상대를 고를 때 조건을 따지는 것이 일반적이다. 물론 이 조건은 다양하다. 외모일 수도 있고, 능력일 수도 있고, 성격일 수도 있다. 아닌 척하지만 사실은 다 따지고 있다. 그런데 중요한 건 아닌 척 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만약 그런 것을 드러내면 마치 '속물'처럼 여기려 하는 이중적인 잣대가 존재한다. 그런데 '짝'에서 참가자들은 그런 것에 대해서 그냥 말을 한다. 바로 이 지점에서 '짝'은 '속물'들이 판치는 '쓰레기'같은 프로그램이라는 비난과 동시에 사실은 매우 '현실'적인 반영을 보여주는 프로그램이 되는 것이다. 그리고 그 이중적인 잣대 안에서 혼란을 빚던 시청자는 짝을 통해 이와 같은 혼란에서 잠시 '회피'하게 된다. 대리 만족이기도 하고, 시원함 이기도 할 것이다.

그래서 '짝'에 대한 시청자들의 의견은 '사랑'보다는 '사람'에 집중될 수밖에 없다.

이처럼 '짝'은 현재의 사랑을 그냥 보여준다. 가감 없이. 일주일이라는 긴 시간 동안 남녀를 한곳에 묶어 놓음으로써 이것이 가능해 졌다. 


- 그리고 반성

결국 '짝'을 보면서 일부는 반성한다. 내 모습을 투영시킬 출연자 혹은 내 모습과 대비할 출연자가 등장하고 거기에 자신을 빗대는 것이다. 

'나는 이것이 잘났다, 나는 이것이 못났다.'
'내 문제가 저거구나. 그 사람의 문제는 저거였구나.'

이렇게 출연자와 자신이 빗대어지고 이를 통해 출연자는 다시 꿈을 꾼다. 

'사랑 다시 할까? 아니면 할 수 있을까?'

이렇게 '짝'의 시청자는 보는 내내 이 프로그램과 자신을 갈라놓을 수 없게 되는 것이다. 물론 이런 과정 자체를 불쾌해하는 사람도 있다. 그 불쾌함은 이것이 현실적이라는 것에서 오는 자연스러운 것이기도 하다. 로봇를 만들 때, 로봇의 얼굴을 사람의 것과 거의 똑같도록 만들면 갑자기 그 로봇에 대한 호감도는 급속도로 떨어진다는 실험결과처럼, 사실 우리는 우리의 모습과 거의 흡사한 것을 보면 불쾌함을 느낄 수밖에 없다. 그리고 그것이 결핍에 대한 문제라면 말이다. 

그러나 이것은 그래도 'TV 프로그램'이라는 아주 약간의 보호막이 이런 불쾌감을 극도로 낮춰준다. 일부만이 느낄 뿐이다. 그 불쾌감을 느끼는 일부를 제외하면 나머지는 이 프로그램의 매력에 폭 빠져 헤어나오지 못하게 된다.


결론적으로 짝은 일반인들의 사랑을 소재로 한다는 것에서 상당히 매력적이다. 그리고 동시에 사랑의 결핍시대에 살아가고 있는 것의 반증이기도 해서 안타깝기도 하다. 이 작품이 너무나 재미없는 작품이 될 때는 바로 우리 모두 많은 사람을 해 나가는 시대가 될 것이다. 그런 점에서 이 재미있는 작품이 빨리 재미없어지기를 바라는 마음도 없지 않아 있다. 사랑하지 못하는 것의 반증, 바로 거기에 짝이 위치하고 있고, 그것이 짝의 성공 이유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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