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엔터테인먼트

너희 모두가 가해자잖아. 안그래? <한공주>

by 박평 2014. 4. 27.

[수많은 스포일러가 담겨 있습니다.]





세월호 사고가 일어난 다음 날. 미칠듯한 상실감을 어쩌지 못해 결국 극장으로 향했다. 비극으로부터의 희망을 보고 싶다는 간절한 바람이 나를 <한공주>로 이끌었다. 수십 명의 동물에게 강간당한 여학생이라는 소재는 영화 자체에서 희망을 찾기 어려울 것이라는 예측을 하게 했지만, 너무 훌륭한 '엔딩'이라는 말이 적어도 끝에는 희망을 안겨줄 것이라는 섣부른 결론을 짓게 했다. 그 결론은 한참 잘못된 것이었지만.


영화는 처음부터 끝까지 반복된 이미지를 관객에게 보인다. 처음 선풍기 앞에 섰던 공주의 학교 선생님은 영화 후반부 성폭행을 하고 나온 고릴라가 선풍기 앞에 서면서 반복된다. 남자 때문에 공주를 버린 어머니는, 역시 애인인 경찰 때문에 공주를 잡지 못하는 선생님어머니로 반복된다. 심지어는 성폭행으로 임신한 친구가 물로 뛰어든 것 또한 물로 뛰어든 한공주의 모습으로 반복된다. 자살하기 전에 걸었던 전화를 공주가 받지 않았던 것처럼, 공주가 물로 뛰어들기 전에 한 전화를 은희는 받지 않는다. 영화는 반복된다.


이 계속되는 반복을 통해 우리는 공주를 아프게 했던 '직접적인 가해자'와 '간접적인 가해자'인 '세상'을 동일시하게 된다. 최대한 공주를 챙겨주려 한 모습을 보였던 학교 선생님도, 결국 공주의 손을 잡아 주지 못했던 선생님어머니도, 돈을 챙기고 탄원서에 서명하게 한 아빠도, 공주를 챙겨주지 않은 엄마도, 공주를 다그치던 경찰들도, 마지막 전화를 받아 주지 않은 친구도 모두 직접적 가해자의 행위와 오버랩이 되며, 그저 가해자의 한 일부로 남는다. 심지어는 피해자였던 한공주도 친구의 전화를 받지 않았음을 밝히고 또 하나의 가해자였음을 드러낸다. 이렇게 영화는 우리 모두가 가해자는 아닌지 계속해서 묻는다. 


화제가 됐던 마지막 엔딩 장면에서 한공주가 바다에 빠져 버렸을 때, 나는 쉽게 그 끝을 예측할 수 있었다. 한공주는 죽고, 세상에 의해 다시 한 번 물에 빠지게 될 것이다. 물에 빠져 자살한 공주의 친구를 들어 올리던 대원들이 줄을 놓치고 시체를 다시 물에 빠트린 장면을 통해, 나는 충분히 이것을 예측할 수 있었다. 공주는 자살하지만, 영화가 계속 그랬던 것처럼 세상은 또 한 번 그녀를 아프게 할 것이었다. 


다행인 건인지, 내 예측과는 다르게 공주는 물 위로 올라왔다. 순전히 자기의 힘으로. 그녀는 죽는 순간에 살고 싶어질 것 같다는 희망을 끝까지 놓지 않았고, 그래서 수영을 배웠다. 그녀는 가해자뿐인 세상에서 어떻게든 살아가기 위해 발버둥을 쳤고, 그렇게 그녀는 물에서 올라오며 삶을 이어간다. 이 장면을 통해 이 영화는 희망을 놓지 않았다. 안도감. 어떻게든 살아야 한다는 그 마지막 희망을 영화는 부여잡는다.


그러나 이 희망은 곧 상당한 불편함으로 바뀐다. 물에서 올라온 공주는 화면 위쪽으로 그러니까 먼 바다 쪽으로 향한다. 세상으로부터의 자유, 해방이다. 하지만 얼마 후 공주는 다시 화면 밑, 공주가 뛰어내린 대교 쪽으로 헤엄쳐 온다. 화면에서는 마치 관객에게 다가오는 것 같이 여겨진다. 여기에서 한공주는 마지막으로 묻는다. 


'난 마지막 희망을 잡았는데, 넌 어떡할 거야?'


영화를 본 관객의 먹먹함은 잠재적 가해자일 수도 있는 우리에게 던지는 저 질문 때문이다. 세상은 여전히 공주에게는 너무나 힘들 곳일 테고, 우리가 그것을 어떻게 나은 상태로 바꿔줄 수 있을지는 오리무중이다. 세상은 똑같을 것이라고 우리 모두가 무의식중에 믿고 있으니까. 


<한공주>는 처음부터 끝까지 편하지 않다. 그것이 우리 세상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기 때문에 더욱 그렇다. 영화가 끝나고 나서 그 먹먹함 가슴을 풀 길이 없어 힘들었다. 방송에서 계속되는 비극적인 뉴스를 보면서 더욱 힘들다. 과연 우리가 사는 세상은 얼마나 많은 '공주'를 죽여야만 하는 것일까?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