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엔터테인먼트

차라리 <아저씨>가 됐으면 좋았을 영화, <동창생>

by 박평 2013. 11. 6.



내가 봤던 모든 영화 중 가장 최악이라고 말하는 영화가 있다. 바로 해리슨포드 주연, 시드니 폴락 연출의 <랜덤하트>이다. 이 영화가 최악의 영화인 이유는 단순하다. 내 기대와 완전히 달랐던 영화이기 때문이다. 이 작품의 포스터를 보고 나는 이 영화가 액션스타 해리슨 포드의 액션을 또 한 번 볼 수 있는 작품이라고 생각했다. 포스터에는 이렇게 쓰여 있었다.


'그를 멈추게 할 수 있는 건 없다!'


이거 누가 봐도 액션 영화 포스터다. 왼쪽 하단에 시뻘건 거 보라. 그러니 영화 보는 내내 액션을 기대할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이 작품 멜로였다. 내용은 간단하다. 죽은 아내가 바람을 피웠었고, 그 바람 핀 상대의 아내를 만나 이번엔 지가 불륜을 저지르는 이야기. 불륜과 불륜의 랑데부랄까? 포스터 문구처럼 그를 멈추게 할 수 있는 것이 없긴 없었다. 그러나 포스터가 풍기는 이미지와 전혀 상관없는 영화 내용은 영화 보는 내내 나를 짜증 나게 했다. 원래 기대라는 것이 그런 법이니까.


<동창생>에 대한 기대는 이랬다. 포스터에 나온 것처럼 '지키고 싶은 단 하나'인 동생을 지키는 이야기. 조금 더 자세하게 가자면, 남쪽으로 온 간첩이, 북한으로부터 버림받고, 자신의 동생을 지키기 위해 애쓰는 이야기. <동창생>이라는 영화로부터 누구나 기대하는 이야기였을 것이다. 이미 영화는 그렇게 홍보되고 있으니까.



<동창생>은 '동생'을 지키려는 영화이긴 하다. 그런데 <랜덤하트> 때처럼 자꾸 기대에 어긋나는 느낌이 든다. '동생'을 지키는 것에 대한 감정의 공유 상태가 전혀 일어나지 않기 때문이다. 영화는 '오빠'와 '동생'사이의 애절함을 전혀 설명하지 않는다. 오빠가 동생을 찾으며 절규하기 위해서, 단지 '오빠'라는 설정만으로 충분하다고 여기는 듯한 이 불친절은, 안타깝게도 '동생'에 절규하는 '오빠'의 모습을 전혀 멋있게 만들지 못했다. 물론 감정이입을 위한 장치가 아예 없었던 것은 아니다. 피아노라는 매개체는 분명 존재했으니까. 그러나 관객에게 공감을 불러일으킬 만한 것은 아니었다.


더 큰 문제는 바로 열아홉 소년이 지키고자 하는 게 '동생'뿐만이 아니었다는 것이다. 우리는 사실 이미 눈치챘어야 했다. 동생을 구하는 오빠의 이야기였다면 제목으로 '오빠'가 더 적절했다는 것을. 아저씨가 구해주니까 <아저씨>라는 제목이 붙었던 것처럼 말이다. 이 영화의 제목이 <오빠>가 아닌 <동창생>이 된 이유는 <동창생>을 구하고자 하는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감정이입을 위해 '오빠'와 '동생'사이에 발생해야 하는 일련의 사건들이, '동창생'과 '동창생'사이에서 발생한다. 동창생의 이름이 동생의 이름과 같다는 설정부터, 동창생과의 사이에서 일어나는 다양한 이야기들은 이 작품이 '동창생'이 '동창생'을 구하는 영화에 더 가깝도록 만든다. 결국 '오빠'가 '동생'을 구하는 영화처럼 포장된 <동창생>은 사실 <동창생>이 <동창생>을 구하는 이야기였다.


이제 더 큰 문제가 발생한다. 영화는 '동생'도 '동창생'도 포기하지 않는다. '동생'을 구하는 '오빠'는 동생과의 애절한 사연 하나조차 없어 그 간절함에 대한 공감이 안 되고, '동창생'을 구하는 '동창생'은 자꾸 '동생'을 입에 올리며, '동생'이 더 중요한 것처럼 '동창생'과 거리를 둔다. 둘 중 누구 하나를 구하더라도 관객에게 그 애절함이 전혀 다가오지 않는 것은 그래서다. 영화는 구하는 사람과 구해지는 대상 사이를 자꾸 갈라놓는다. 동생을 구하러 가겠다는 '오빠'는 '동창생'에게 편지와 가족사진을 남긴다. 편지와 가족사진은 머리핀에 꽂혀 있는데, 이 머리핀 2개는 사진에 있는 동생의 얼굴을 처참하게 가리고 있다. '동생'을 그리 아끼는 오빠가 동생 얼굴 위에 머리핀을 두 개나 꽂지는 않았을 것이다. '동창생'을 구하러 가면서는 동생에게 전화를 걸고 난 후에 '절규한다.' 그 절규는 마치 '동생아, 나 가기 싫어!!'를 외치는 듯하다. 물론 동창생을 구하러 갔다가 다시는 동생을 못 볼 수도 있다는 그런 감정에서 절규했을 수도 있다. 그런데 그렇게 동생이 좋으면 차라리 가질 말든가. 


그러니까, 열아홉 소년이 구할 여자가 두 명이 되면서 대상에 대한 감정이입, 구하는 것의 간절함에 대한 마음의 동요가 전혀 일어나지 않는다. 그리고 이건 영화 안에서 가장 큰 관계인 이들 3명뿐만 아니라 나머지 관계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다. 


영화는 너무 많은 관계를 만들어 놓고, 그 관계들로부터 관객이 감정의 동요를 느끼길 바란다. 남한에서 소년을 입양한 어머니가 죽었을 때, 자신에게 밥 해주던 할머니가 죽었을 때, 관객이 찡함이나 안타까움 같은 감정들을 느꼈으면 하는 바람이 눈에 훤히 보인다. 안타까운 점은, 바람과는 반대로 감정의 동요가 잘 일어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감정의 동요가 생기기엔, 관계 사이의 농도가 너무 옅다. 차라리 모든 관계를 다 빼고, 오직 여자 두 명에 집중했다면, 아니면 그마저도 줄여서 오직 동창생이나 동생 한 명에게 집중했다면 어땠을까? 하는 생각이 계속 든다. <아저씨>가 오직 아이 한 명에게만 집중한 것처럼 말이다.


또 다른 문제는, 등장인물들 간의 관계의 농도가 낮은 것에 더해서 등장인물 자체의 농도도 낮다는 점이다. 윤제문, 조성하, 김유정 같은 훌륭한 배우들이 전혀 드러나지 않는다. 탑도 전혀 부각되지 않는다. 어째서 북한 출신의 이 소년이 북한사투리를 전혀 쓰지 않는지 이해가 되지 않는다. 북한말 비슷한 것은 오직 동생과 통화할 때 단어 한두 개 정도일 뿐, 탑은 영화 내내 전혀 북한말을 쓰지 않는다. 그래서 간첩이라는 느낌, 북에서 왔다는 느낌, 전혀 없다. 이렇게 캐릭터가 살아 있지 못하니 모든 사건이 만들어 내는 갈등의 깊이가 얇을 수밖에. 그리고 이 얕은 캐릭터는 다시 관계의 농도를 더 얕게 만든다. 마치 뫼비우스의 띠처럼 서로서로 농도를 계속해서 낮추는 것이다.


거기에 액션도 시원하지 않다. 액션은 단순하고 급하고 짧다. 액션으로 얻을 수 있는 쾌감은 <아저씨>나 <내가 살인범이다>, <베를린>등에서 얻을 수 있는 수준에 한참 못 미친다. 덕분에 영화는 지루해진다. 영화가 끝나고 내 앞에 있던 관객들은 '안 잤어?'라고 물으면서 자리에서 일어났다. 안타깝다. 감정의 공유도 액션의 시원함도 부족한 영화가 되어버렸다.


그나마 한가지, 단 한 가지라도 장점으로 들 수 있는 것을 물어본다면 '한예리'를 말할 수 있다. 이미 독립영화에서 그 실력을 인정받고, 대중 영화에서도 지속해서 좋은 연기를 보여주고 있는 이 배우는 '동창생'의 배역을 맡아, 유일하게 자기의 캐릭터를 매력적으로 만들어 냈다. 그것이 그나마 각본이 지니고 있던 마지막 힘이었건, 배우의 힘이었건 어쨌든 그녀는 이 영화 안에서 유일하게 빛나는 배우이다.


동생을 구해야 하는 배신당한 간첩의 이야기. 물론 좋고 훌륭한 소재다. 게다가 동생이 핫한 김유정이고, 오빠가 빅뱅의 탑이다. 얼마나 신이 나는 조합인가? 그러나 안타깝게도, 영화는 너무 많은 욕심을 부렸다. 그 욕심들이 영화를 너무 붕 떠 있게 만들었다. 차라리 모든 것을 다 빼고, 그냥 '탑'이 '김유정'을 구하러 가는 이야기만 했다면 훨씬 더 괜찮은 영화가 됐을 것이다. 아니면 '한예리'만 구하던가. <아저씨>가 되는 길을 선택했다면 어쩌면 <오빠> 열풍이 불었을지도 모르겠지만, 현재로선 결과는 그와는 정반대일 가능성이 높아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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