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엔터테인먼트

테러가 일상이 된 대한민국을 그리다, <더 테러 라이브>

by 박평 2013. 7. 28.


테러 : 폭력을 써서 적이나 상대편을 위협하거나 공포에 빠뜨리게 하는 행위. (국립국어원)


영화 <더 테러 라이브>는 단순한 영화다. 테러범에게 전화가 오고, 변방으로 밀려난 왕년의 앵커가 이를 생중계하기로 결정한다. 테러범과 앵커의 숨막히는 신경전이 전화상으로 펼쳐지는 작품이라고 보면 아주 완벽한 설명일 것이다. 영화는 복잡하지 않고 단순하며, 화면은 생중계가 진행되는 스튜디오를 거의 벗어나지 않는다. 누가 보더라도 단순하다는 것은 이 영화가 가진 가장 큰 장점일 것이다. 


그런데 이 영화, 찬찬히 뜯어보면 꽤 복잡하다. 이야기가 그렇다. 영화의 이야기는 '테러'를 단순히 대형 살상이나 혹은 목적을 위해 무차별적인 공격행위를 하는 것에 국한시키지 않는다. 영화는 처음에는 '테러범'을 전면에 내새우지만 시간이 지날 수록, 테러범 만이 테러를 저지르고 있는 것이 아님을 서서히 밝힌다. 사실 테러는 우리에게 일상적으로 일어나고 있는 행위임을 말하는 것이다. 바로 그렇기 때문에 <더 테러 라이브>는 마포대교를 폭발시키는 테러 상황을 생중계한다는 의미에 더해, 테라가 일상화 되어버린 삶, 혹은 이미 계속 해서 일어나고 있는 다양한 테러에 대한 이야기를 하겠다는 의미도 갖게 된다.


<더 테러 라이브>에서 테러범의 전화를 받는 앵커 '윤영화'는 사실 자신이 테러를 저질러온 사람이다. 아내인 기자의 보도를 자기 것으로 해서 상을 받았고, 테러범의 전화를 받자 마자 신고를 했으면 다치지 않았을 수많은 사람들을 자신의 목적을 위해서 희생시키는 인물이기도 하다. 또한 같이 일하던 라디오PD를 감언이설로 속인 후에 내친 것도 그다. 폭력이라는 것이 단순히 주먹을 휘두르는 경계를 넘어선다고 정의하는 순간, '윤영화'는 지극히 일상적인 테러범이 된다.


보도국장 '차대은'도 마찬가지이다. 오직 시청률 70%를 넘기는 것만이 그의 관심사이고 그렇기에  테러범을 자극하는 멘트를 만들어 '윤영화'에게 읽으라고 강압한다. 그에 응하지 않자 '윤영화'의 신상과 비리를 타 방송국에 넘겨 버리는 모습은 그가 지독한 테러리스트임을 보여준다. 그는 마포대교의 인질들을 손쉽게 버리자 말하고, 사건이 해결 되기도 전에 시청률 70%를 찍자마자 현장에서 떠나 버린다. 


당국도 똑같다. 경찰청장은 화면에 나와 테러범을 협박하고 테러범의 아들에 대한 신상까지 공개하겠다고 테러범을 자극한다. 청와대도 마찬가지다. 인질로 잡힌 마포대교 위의 사람들을 구하기 위해서 '사과'할 생각은 하질 않는다. 오히려 테러가 종결되려 하자마자 윤영화를 희생양으로 삼아 잡아 넣으려고 한다. 이도 테러다.


그러니까 <더 테러 라이브>는 단순히 마포대교를 폭파하려는 테러범의 이야기가 아니다. 대한민국에서 일상적으로 일어나고 있는 수많은 테러들에 대한 이야기이기도 하다. 주인공 윤영화부터 모든 이들이 다 테러범이고 동시에 피해자이기도 하다. 유일하게 피해자로만 등장하는 것은 '윤영화'의 부인인 기자뿐이다. 이 기자는 남편에게 보도를 빼앗겼지만 끝까지 현장에 남아 인질을 구하기 위해 최선을 다했다. 또한 마포대교의 인부들도 마찬가지다. 즉, 그저 현재를 열심히 살고 있는 '시민'들은 피해자로만 남는다. 물론 테러범이 등장함으로서 그런 시민 중에 가해자가 나타나기 시작한다.


반대로 오직 가해자로만 남은 이들도 있다. 가장 정점에 있는 존재들이다. 영화에서는 보도 국장인 '차대은'만이 큰 피해를 입지 않는다. 그는 70%시청률을 달성했고, 중간에 떠 났다. 그는 그 자리에서 정점에 있는 인물이었다. 그리고 청와대의 그분 또한 전혀 피해를 입지 않았다. 그분은 테러에 대한 단호한 대처를 천명하며 오히려 자신의 지위를 명확히 할 기자회견을 갖는다.


이를 정리하면 정점에 있는 이들만이 가해자로서만 존재하고 언제나 피해자였던 시민을 포함한 나머지 전부는 가해자겸 피해자가 되고 있는 것이다. <더 테러 라이브>는 바로 이 그림을 그린 것으로 보인다.


그렇기 때문에 '하정우'의 원맨쇼 같은 이 작품에 대한 일련의 아쉬움들, 예를 들어 적으로 나와야 하는 상대가 너무 존재감이 없다 던가 하는 것들은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 '윤영화'는 곧 대한민국 그 자체를 대변하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그는 자신의 이익을 위해 나쁜 짓도 하고, 때로는 정의로운 사람이기도 하며, 때로는 가해자 이기도 하고 때로는 피해자 이기도 하다. 이는 대한민국의 모습이며, 따라서 윤영화가 느끼는 모든 감정들은 다시 영화를 보고 있는 관객에게 그대로 전달되게 된다. 이 영화에서 국민은 협박 당하고 있고, 무시 받고 있으며, 살려고 애쓰고 있고, 그러나 버림 받는 존재이다. 이 작품에서 그 말고 더 강조 되어야 할 존재는 없었다. 


윤영화는 결국 자신이 사랑하는 사람도 잃고, 테러범을 구해내지도 못한다. 그리고 스스로의 선택도 내린다. 그의 마지막 선택이 우리에게 주는 의미는 결국 정점의 제거이다. 따라서 이 작품은 우리 자신의 모습에 대한 반성의 의미와 동시에 그럼에도 '가해자'로서만 존재하는 정점에 대해 '피해자'가 되어 봤으면 좋겠다는 바람이 담겨있는 작품이기도 하다. 


<더 테러 라이브>는 매우 영리한 영화다. 한 공간 안에서 이렇게 많은 이야기를 하려 한다는 것, 그리고 그것을 꽤 효과적으로 전달했다는 것은 감독의 연출력을 입증한 것이기도 하다. 그와 동시에 이 영화는 '하정우'의 영화이기도 하다. 영화 내내 그는 청와대이기도 하고, 테러범이기도 하고, 언론이기도 하며, 일반 시민이기도 하다. 한명의 인물로서 이 다양한 이야기를 전달할 수 있다는 것은 '하정우'가 얼마나 대단한 배우인지를 알려주고 있다.


대한민국은 '테러'가 판치는 나라이다. 가만보면 <설국열차>와 맞대결을 해야했던 <더 테러 라이브>가 유료 시사를 명분으로 일종의 조기 개봉을 한 것도 일종의 '테러'행위 일지도 모른다. 이 일상적 테러가 만연한 대한민국에서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할까? 감독의마지막 장면은 정말 '정점'을 피해자로 만들기 원한 것일까? 아니면 산산히 조각난 '법칙'의 부활을 종용 하고자 하는 것일까? 그 답이 무엇이건 간에 확실한 것은 우리는 지금 꽤 격렬한 삶을 견뎌나가고 있다는 사실일 것이다. 귀에 언제 터질지 모르는 폭탄을 낀 채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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