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엔터테인먼트

누가 힙합을 구리게 만드나. <쇼미더머니>

by 박평 2015. 8. 1.




힙합이 한국에서 가장 핫하고 가장 큰 사랑을 받는 장르가 된 것은 얼마 되지 않은 일이다. 20여 년전 힙합이라는 장르가 천대받으면서 자라나기 시작했다. 홍대의 힙합 클럽에서 1세대 래퍼들이 공연도 하고, 믹스 테이프도 만들고, 팬층도 확대하고 그렇게 하나하나씩 바닥부터 다져서 힙합이라는 장르의 기반을 잡아왔다. 가리온과 cb mass, 드렁큰 타이거와 허니 패밀리 그리고 조PD까지. 그렇게 그들은 한국에 힙합 문화를 만들어 온 1세대 들이다.


그중에 일부는 오버에서 성공을 거뒀고, 일부는 언더에서 성공을 거뒀지만, 대중적으로 힙합이라는 장르가 지금처럼 폭넓은 사랑을 받지는 못했다. 여전히 힙합 하면 '못 사는 애들, 사회에 반항적인 애들, 마약이나 하고 나쁜 짓이나 할 것 같은 애들'이라는 인식이 있었다. 그런 시선에서도 그들은 음악적으로 애썼고 노력했고, 문화를 만들어 나가려 했고, 속된 말로 간지를 잃지 않으려 했다. 난 그들의 그런 힘이 한국의 힙합을 이렇게 성장시킨 자양분이라고 분명히 생각한다.


<쇼미더머니>라는 프로그램이 생겼고, 대중은 힙합에 환호했다. 난 이 프로그램이 힙합을 대중화시키는 것에 아주 크게 기여했다고 판단한다. 힙합 하면서 대중적으로 인기를 끌고, 많은 돈을 벌 수 있게 만들어 준 프로그램이었다. 래퍼들이 꿈꾸던 미국 래퍼들의 블링블링을 따라할 수 있는 계기이자 기회이기도 했다. 그러니 이 프로그램, 허니버터처럼 달 수밖에 없다.


문제는 이 프로그램이 계속되고, 그 영향력을 점차 확대시켜 나가면서 발생했다. 이젠 래퍼라면 이 프로그램을 피할 수 없게 됐다. 이제 힙합은 대중적인 음악이 됐고, 래퍼들이 원하는 것은 대중에게 사랑받고 블링블링해 지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는 욕할 일은 아니다. 당연한 일이다. 장르가 인정받지 못했던 시절이라면 장르의 자존심을 지키는 것, 래퍼의 자존감을 무너트리지 않는 것이 그들이 추구해야 할 일이었다. 하지만 장르가 대중화되고 큰 사랑을 받게 된 이후에는 더 많은 대중의 환호를 듣는 것이 추구해야 할 일이다. 대중을 쫓는 건 오히려 바람직하다. 시인의 이야기를 더 많은 사람들에게 전할 수 있는 일이니까.


그래서, <쇼미더머니>에 참가하는 래퍼를 후지다고 말할 수가 없다. 그들에겐 더 많은 대중과 소통하는 것이 아주 중요한 의무이기도 하다. 대신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중과의 소통을 위해 광대가 되는 것을 마다하지 않는 모습, 과거 천대받던 시절에 지켜왔던 래퍼로서의 자존감을 잃는 모습을 보는 것은 꽤 씁쓸하다.


래퍼들은 <쇼미더머니>라는 틀 안에 들어와서 시스템을 욕하고, <쇼미더머니>를 욕한다. 그럴 수 있다. 그들의 목소리는 그렇게 하지 않으면 대중에게 들리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이들은 최소한의 자존감은 지키려 하는 것이다. 서출구가 얼토당토 않은 사이퍼에 굴하지 않은 것처럼, 비록 탈락했음에도 <쇼미더머니>와 비즈니스 힙합에 대해 일갈을 한 P-type처럼. 


그런 점에서 브랜뉴의 번복은 후졌다. 번복 자체가 후졌던 것은 아니다. 판단이 잘 못 됐다면 그럴 수 있다. 잘못을 인정하는 것은 용기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이미 결정된 것을 번복하는 것은, 심지어는 그것을 어깨 움츠리고 마치 죄진 것처럼, <쇼미더머니>라는 거대한 스테이지의 제작진에게 가서 애원하듯이 구걸하는 모습은 확실히 후졌다. 시스템 안에서 잃어버린 자존감은 블랙넛의 랩으로 더욱 확실해졌다. '정치질. 대중으로부터 받을 비난에 쫀.' 블랙넛은 무너져버린 자존감에 총알을 날렸다.


물론 아쉬운 것은 그렇게 일갈해놓고 블랙넛도 다시 그 비즈니스의 스테이지 속으로 들어갔다는 것이다. 할 말 하고 나와 버렸으면 됐을 것을 그는 <쇼미더머니>의 허니버터에서 벗어나진 못했다. 


이 모든 일의 가장 큰 문제는 <쇼미더머니>제작진이다. 그들은 '쇼 앤 프루브'하겠다고 했다. 하지만, 그들에게 힙합에 대한, 래퍼에 대한 조금의 리스팩트라도 있었다면, 이런 장면을 화면에 내보내진 않았을 것이다. 아니, 애초에 이런 제안이 왔을 때, 이건 안된다며 단칼에 잘랐을 것이다. 힙합이 천대받던 시절에 1세대 힙합퍼들은 자존감 하나로 버텼다. 한국 힙합의 뿌리는 '딸래미들 따먹겠다'는 스웩이 아니라, 세상 모두가 우릴 무시해도, 우리는 세상에 대고 할 말하는 아티스트라는 자존감이었다. 그에 대한 이해가 있었다면, 세상에 대해 일갈할 수 있었던 그 시인들이 세상 속에 들어가 어깨 움츠리고 구걸하는 듯한 장면을 연출하거나 쓰진 않았을 것이다. 그것도 몰랐다면? 자격미달이라는 소리다. 알면서도 재미를 위해 그 상황을 방송한 거라면, '쇼 앤 프루브'따위는 애초에 없었단 얘기다. 


힙합을 돈 되는 장르로 만들어 준 <쇼미더머니>가 이제 힙합을 구리게 하는 데 앞장서고 있다. 씁쓸하다. 세상은 변한다. 1세대 힙합이 지니고 있던 그 한을 계속 이어갈 필요는 없다. 지금의 힙합은 지금의 힙합을 하면 된다. 그것이 피처링이든, 사랑이야기든 상관없다. 힙합은 세상을 이야기하면 될 뿐이다. 하지만 힙합이 구려지는 것은 또 다른 이야기다. 그들이 하는 사랑이야기도, 그들이 하는 세상 이야기도, 블링블링도, 스웩도 앞으로는 모두 구린 것이 될 수 있다. 그때가 되면 힙합은 그저 돈놀이 밖에 안될 것이다. 리스펙트? 지금 이건 확실한 디스리스펙트다. 더 이상 힙합을 구리게 만들지 않았으면 좋겠다. '쇼 앤 프루브'를 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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